은혜의 강단/2022년 말씀

나보다 상대방을 더 앞세웁시다(행 13:13~1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9. 16.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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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서 제일 곤란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에게 돌아올 명예나 이익을 상대에게 조건 없이 넘겨주고 또 밀어주는 일입니다.

만일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끼리 양보하고 밀어주는 마음가짐이 뒷받침된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 곳에 진정 사랑의 열매가 가득하게 맺힐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동료끼리 우정 어린 장면 하나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대단히 인상 깊습니다. 그 장면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 공동체도 이런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누구 이름이 안 보입니까? 바나바입니다. 이 부분 앞까지는 바나바와 사울입니다(행 13:02, 07). 그런데 13절에 와서 바나바의 이름이 감추어졌습니다. 사람 생각으로 보면 이거 대단히 마음 상할 일입니다.

왜 상한다는 말입니까? 선임자의 이름이 후배에 의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름이 가려진 것이 바나바가 바울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를 보임으로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나보다 상대방을 더 앞세웁시다. 라는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지며 강론하겠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먼저 바나바와 바울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행 0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바나바가 누구입니까? 알고 보면 바울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바울로 개명하기 전 사울은 다메섹에서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또 예루살렘에 와서는 복음 전하는 사도들을 사귀고자 하나 모두가 사울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때 사도들 세계에서 잘 알려진 바나바가 사울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도들과 폭넓은 교제를 나누도록 연결해 준 일입니다. 이에 따라 사울은 복음에 대하여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복음의 지식으로 무장하여 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신학 논쟁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의 대적 유대인이 사울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자 사울의 측근들이 사울을 고향 다소로 보내 은둔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행 09:28~30). 그 시간이 10년이나 지나갔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로 파송 받았습니다. 바나바는 즉시 안디옥 북서쪽 약 13km 떨어진 길리기아주(州) 다소에 가서 사울을 안디옥교회로 데려왔습니다.

 

다소는 길리기아의 중요한 도시입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계(中繼) 무역을 하였고 그리스 철학을 비롯한 헬라 문화가 자리 잡은 지역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 핵심 구성원이 각국에서 온 사람이라는 점에서 로마어와 헬라어를 능하게 구사하는 사울이 꼭 필요한 일꾼으로 보고 데려왔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을 마음에 품은(갈 01:16) 사울이 와서 함께 일함으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바나바야말로 사울을 초대교회의 일꾼으로 세우는 일에 큰 역할자입니다.

 

행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바나바는 사울보다 신앙의 선배입니다. 또한 연륜으로나 신앙으로나 성숙한 인격과 인품을 지닌 귀한 사람입니다. 사울에게는 스승과도 같은 급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일할 때 서열을 보면 바나바와 사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 고향 구브로 전도를 잘 마치고 난 후부터 서로의 위치가 바뀝니다.

 

바울이 선교를 이끌어 가는 주체가 됩니다. 회당에서 설교할 때도 바울이 맡아서 합니다(15, 16).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의 관계 설정은 첫 선교지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에서 바나바가 선교 일정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바울로 이름이 바뀌면서 다음 선교지를 향할 때는 바울이 선교의 주도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바나바가 주도권을 바울에게 넘겨준 셈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한 누가가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13)이라고 표현한 것은 리더십의 전환이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2. 선교의 주도권을 넘긴 후에도 바나바는 협조를 잘합니다.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처음에는 바나바가 초야에 묻혀 있는 바울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임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지에서의 열정을 품은 바울을 보고 바나바는 자기보다 바울이 선교 일정을 이끌어가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선교의 주도권을 넘겨주었습니다.

바울이 훗날 로마 옥중에서 빌립보교회를 향해 권면할 때도 지난날 바나바와의 관계에서 그 양보의 미덕을 생각하고 이런 글을 보낸 것 같습니다.

 

빌 02:0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0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런데도 바나바는 조금도 이탈하지 않고 여전히 함께 일합니다. 그의 폭넓은 마음을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잘 전파될 수 있느냐? 누가 앞장을 서야 복음이 더 잘 전파되느냐에 있었습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사는 그런 이기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누구냐? 내 신분을 사람들이 어떻게 인정하느냐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앞장서서 사람을 이끌어 가기보다는 도와주는 협력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선봉자가 아니라 내조자 역할을 좋아하였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일을 뒤처리하는 자리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교회 일에도 앞장서 설교하고 외치고 모든 일을 조직하여 끌고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 있다고 교회의 일이 다 잘될 것 같습니까?

뒤에 조용히 앉아서 일을 정리하고, 도와주고, 협력하는 사람이 있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모여서 조화를 이루어야 행복한 교회가 됩니다.

 

누가 높으냐? 누가 낮으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와 은사대로 일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교회는 아름답고 사랑이 생기고 든든히 서가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들은 모세 밑에서 잘 자랐고 모세를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광야 생활 마무리 시점에서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택하였습니다. 그에게 모세의 지도력이 승계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갈렙의 입장에서는 섭섭하고 약간의 갈등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모세를 섬기는 일로 두 사람 관계에 갈등이 전혀 없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같이 정탐한 역전의 용사입니다. 갈렙이 여호수아와 비교하면 더 젊고 패기 있습니다. 그런데 동료인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나가니 섭섭함과 격정이 일고 다소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수아가 후계자가 된 이후 갈렙의 이름은 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갈렙이 조용한 자리를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보면 언제나 여호수아가 지휘하였지만, 사실은 여호수아 뒤에 갈렙이 바치고 있었습니다. 갈렙으로 인해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잘 치러 낸 셈입니다. 

만약 갈렙이 없었더라면 여호수아가 능력이 있어도 전쟁을 잘 치르고 통솔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일에는 리더와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교회의 일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3. 나보다 남을 앞세우면 마음이 더욱 넓어집니다.

 

행 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 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보면 주도권 문제로 갈등이 가끔 일어났던 때가 있었습니다(마 18:01). 한번은 세베대의 어머니가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출세를 위해 예수님께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

 

마 20:20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지도자의 자리나 그중에서 좀 더 크게 인정받기를 바라던 제자들 모습에서 그들이 높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강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더 크냐? 하는 생각에 잡혀 있었지만, 오순절 날 성령님의 강림 사건 이후 제자들은 낮은 자리로 내려왔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은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 누가 좀 더 인기가 있느냐? 하는 일에 관하여 관심 가지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도 바울을 앞세우고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았습니다.

협조자로서의 일을 잘하였기 때문에 1차 선교의 결과는 성공을 가져왔습니다. 다시 바울이 바나바에게 선교 일정을 제안합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밑에서 일하는 조력자임에도 흔쾌히 동의합니다. 단 수행원을 누구로 데리고 가느냐 하는 문제로 안타깝게도 서로 크게 다투고 갈라서고 맙니다.

 

이때 바울이나 바나바의 마음에 품은 생각이 달랐지만, 굳이 두 사람이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선교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뒤에서 기꺼이 밀어주면서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더 넓어졌습니다. 리더십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면 그때부터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더욱 넓어집니다. 그 증거가 사도행전 15장에 나옵니다. 어떤 일이 나옵니까?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이 일어나자 예루살렘교회를 중심으로 총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때 회장은 응당히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아닌 오히려 늦게 믿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되었습니다(행 15:13).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투표하여 지지율이 떨어져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 넓은 마음으로 리더의 권위를 배려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빌 03:0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0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교회 일은 교회 안이나 밖에서 내가 꼭 들어야 한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생각 뒤로 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공동체에 나보다 좀 늦게 들어오고 나보다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더 기뻐하시면 기꺼이 밀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탄의 졸개들이 리비아 사막에 살고 있던 한 성직자를 유혹하여 쓰러뜨리려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악한 무리의 집요한 유혹에도 그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의 정욕을 건드려도 보고 의심과 두려움의 화살로 맹공을 가해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요지부동이자 사탄이 직접 나서 시범을 보이겠다고 말합니다.

 

너희의 전략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어. 내가 하는 것을 잘 봐. 하면서 사탄은 그 성직자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이봐, 당신 동생은 벌써 알렉산드리아의 주교(主敎)가 되었다고.

이 말은 듣고 있던 성직자의 얼굴이 즉각 험악해지면서 먹구름이 드리워졌습니다. 사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졸개들에게 말합니다.

 

시기 바로 이거야.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겐 이게 최후의 무기지.

 

잠 14:30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상대의 장점을 보는 눈을 가집시다. 상대의 약점보다 장점을 보는 것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상대의 약점을 보기 시작하면 넓은 세계를 볼 수 없고 항상 불평과 원망의 삶을 살기가 쉽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라고 하는 젊은 후배의 장점을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 안목이  초대교회 시절 사울을 귀한 일꾼으로 등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삶이 복된 삶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도 바나바와 같이 나보다 남을 앞세우면서 살아가는 복음의 증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