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2년 말씀

하나님 악인이 왜 형통합니까? (렘 12:01~1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7. 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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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깊은 관심사 중 하나를 질문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은 형통합니까? 예라고 하면 이 말은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 형통한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핍박받아서 괴로운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다시 반대로 질문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불통합니까? 예라고 하면 이 말도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도 형통치 못한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안 믿고 살아도 형통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논의 자체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영생의 세계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잠깐 사는 세상에서 한 단면만 보고 형통하다 형통하지 못하다는 말은 논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무조건 잘 된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말은 언제나 물음표입니다. 맞을 때도 있고 맞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 07:15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현실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을 만나 힘들어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일을 만나도 믿음은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하나님 악인이 왜 형통합니까?」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예레미야가 악인의 형통을 놓고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0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선지자 예레미야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하나님께 묻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악한 자의 길이 어떻게 형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평안할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가 왜 이런 질문을 합니까?

질문을 하게 된 배경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예레미야가 20대에 하나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선지자의 시각으로 당시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부패한 형태를 본 예레미야는 의분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소위 사회지도층이 부정과 부패에 빠져 있느냐며 신랄하게 책망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거룩한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다고까지 공격하였습니다(렘 07:09~14).

 

이런 지적을 받은 사람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당장 예레미야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죽이려는 음모까지 꾸몄습니다. 그것도 고향 사람들이 말입니다(렘 11:18~23).

그래서 본서 전체를 놓고 보면 예레미야의 선지자 사역이 매우 힘듦을 볼 수 있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 위로해 주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무래도 가까이 있는 가족과 고향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의 가족부터가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06). 그러니 예레미야는 예언자 사역 자체가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힘든 선지자 직을 맡기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악인은 잘 먹고 잘사는데 의롭고 선한 사람은 고통을 당하느냐며 따짐이 바로 01절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자기의 한탄을 마음껏 내어놓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도 하나님께 전심으로 다가가는데 왜 내가 고난과 박해를 당해야 합니까? 나를 괴롭히는 저 불의한 고향 사람(제사장)은 저렇게 형통한데 나만 계속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하고 탄식하는 예레미야의 아픈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회개하지 않고 악한 길을 고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도 없고 잘만 살아가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여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예레미야의 불평과 따짐은 04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해야 합니까?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고 짐승과 새들도 멸절해 갑니다. 창궐하는 악한 세력 때문에 모든 주민에게까지 재앙이 미쳐 점점 희망을 잃어갑니다.

이 악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었습니다. 악인의 번성에 대한 의구심은 욥기에도 나오고 아삽의 시에도 나옵니다(욥 21:07, 시 73:02~05). 이런 일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답변하십니까?

 

마 0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는 단순한 인과응보의 법칙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면 마지막에 심판당한다고 경고하십니다(눅 11:31~32).

하나님께서 계획한 의도는 악인을 번성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회구조의 모순 속에서 악인이 번성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잠시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더 차원이 높은 공의와 자비의 실행을 위한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2. 예레미야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05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예레미야의 불평에 대하여 하나님의 답변이 05, 06절에 나옵니다. 예레미야의 불평은 일말의 동정이 갑니다. 죽음의 위기까지 맞았기 때문입니다. 힘든 예언자 사역인 만큼 좀 불평이 나와도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좀 달래주어야 할 상황입니다.

예레미야야, 많이 힘들지, 조금만 더 참아 봐, 내가 알아서 뒷받침해줄게, 힘을 내. 이런 정도의 위로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05절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대답을 보면 예레미야의 예상과는 달리 동문서답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새번역]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해도 피곤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네가 조용한 땅에서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요단강의 창일(漲溢)한 물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이렇습니다. 예레미야야, 이 정도 일로 벌써 지쳤느냐? 아직은 평안하지 않으냐? 앞으로 더 힘들 때가 올 것이다. 요단강 물이 넘치는 것 같은 큰 어려운 일을 만날 것이다. 지금 어려움은 앞으로 만날 큰일을 감당하기 위한 작은 훈련에 불과하다. 너 자신을 잘 훈련해라.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예레미야를 아나돗 사람이 반대하고 죽이려는 살기등등한 상태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앞으로 당해야 할 고통이 그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막강한 슈퍼맨이 아닙니다.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훈련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혹을 떼려고 불평하는 예레미야에게 오히려 더 큰 혹을 붙여주신 셈입니다. 하나님 방식은 칼과 창을 동원한 권력으로 복종시키는 방식이 아닙니다. 약함과 겸손의 힘으로 일하십니다.

이것이 시대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예레미야가 앞으로 당해야 할 고통은 지금 당하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제 예레미야의 예언자 사역은 평생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했을 때 다른 선지자들은 아무 근거도 없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물리쳐주십니다. 안심하십시오. 라는 희망의 메시지만 남발하였습니다.

반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항복해야 합니다. 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당연히 예레미야는 반민족주의자로 매도당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물도 음식도 먹지 못하며 지내다 겨우 석방되었습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등한히 한 유다왕국은 바벨론에 의해 망하였으며 성전도 불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비참하게 죽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때가 B.C. 586년입니다. 베냐민의 성읍 아나돗에서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20대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고독한 예언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누구보다도 극심한 오해와 모함을 당하면서도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와긴, 시드기야 왕 때까지 40년을 예루살렘 멸망을 외쳤습니다. 

한편 바벨론으로 끌려가지 않은 남은 유다 백성은 끝까지 예레미야를 괴롭혀 반민족주의자로 몰아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예레미야와 성경 대필자 바룩까지 이집트 다바네스로 끌고 갔습니다. 거기서 많은 괴롭힘을 당하다 동족에게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3. 하나님께서 악인은 뽑아 버리는 때가 곧 옵니다.

 

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대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14절을 보십시오. 유다를 황폐화하려는 주변 모든 나라를 하나님께서 손을 보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보신다는 말은 심판을 말합니다. 가까이는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의 길로 달려간 유다 백성과 멀리는 유다왕국 주변의 악하게 굴었던 모든 나라를 손보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워서 당장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랑이 무엇보다 우리에게 좋습니다. 만일 악인을 당장 심판하신다면 우리도 그 멸망 속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복된 통로에 있습니다. 이 자리 벗어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날까지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심판의 때는 반드시 찾아오며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분명 가라지 같은 자를 뽑는 날이(마 13:30) 있습니다.

 

전 03:0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0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0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우리는 오래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의인이 고난을 겪는 까닭은 하나님이 안 계셔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셔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사랑하지 않으셔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뽑아 버리시는 심판의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에 손을 대고 해친 자는 그 어떤 자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그 대상이 이웃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고 세계만방 모든 국가일 수도 있습니다.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아삽이 지은 시편 73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삽은 주변 사람을 볼 때 의인은 고난을 받으며 힘들게 사는 데 비해 악인은 더욱 잘 되는 것을 보고 혼란이 왔습니다.

어떻게 불신자가 신자보다 더 형통하게 잘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다 아삽이 성전에 가서 기도하는 가운데 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안 풀리던 문제가 풀리는 장면을 보겠습니다.

 

시 73: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아삽이 기도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은 악인은 세상에서는 형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마지막에 그들에게 소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악인의 형통함 뒤편에는 소망 없는 삶 지옥의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제일 무섭습니다. 악인의 삶은 풀처럼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며(시 92:07), 악인은 죽을 때에 특별히 그 불의의 소망이 없어집니다(잠 11:07).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구속함을 입었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소유물이 되었습니까? 그러면 그 어떤 세상의 강을 건너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사 43:01….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0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은 인생을 평가할 때 전체를 보지 않고 한 단면만 볼 때가 많습니다. 현재 조금 잘 된다고 너무 들뜨지 말고 현재 조금 안 된다고 의기소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 때로는 원치 않는 불평의 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 시험에 들 때도 종종 있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냉정함을 유지하여 마음을 넓혀보십시오. 별것 아닌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살다 보면 왜 불평거리가 없겠습니까? 그 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오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해결함을 받기를 바랍니다.

 

세계의 뉴스를 보면 가끔 장수(長壽) 마을이 소개됩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모여 사는 장수촌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해외 토픽에 장수 마을로 소개된 곳을 보면 다 예수님을 믿는 마을이 아닙니다.

이슬람 계통의 마을과 불교 계통의 마을 그리고 일본의 신사 섬기는 마을입니다. 장수가 아무리 중요하여도 믿음 없는 곳 예수님 없는 곳이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예수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예레미야 하면 일명 눈물의 선지자로 불림을 아실 것입니다. 왜 눈물의 선지자로 불립니까? 예레미야가 활동한 그 시대가 믿음의 눈으로 보면 어두운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조국이 망하여 가는 것을 보고 수없이 회개의 메시지를 날렸음에도 멸망의 길을 걷는 유다 백성의 모습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믿음의 눈으로 봅시다. 죽어가는 영혼을 봅시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합시다. 불평이 사라지는 예수촌을 만들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