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2년 말씀

당신은 매우 불행합니다[큰아들 눅 15:25~3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6. 25.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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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행복을 구합니다. 복된 삶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행복을 찾아 헤매는 나그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찾아다녀도 끝내 찾지 못한 채 삶을 마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이런 비극을 맞이해야 합니까? 아무래도 행복의 조건을 외부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행복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내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이 올 수도 있고 떠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 앞부분 11~24절 보면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작은 아들의 이야기 일명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지난 두 주일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을 떠나기만 하면 시원한 자유와 함께 황홀한 행복이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먼 나라로 독립해 갔습니다.

작은아들은 그 삶을 조절하지 못하여 죽음과 다름없는 불행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잘못인 줄 알고 아버지의 집으로 과감하게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결과는 지난날 박차고 나간 행복의 회복이었습니다.

오늘은 행복 조건을 갖춘 환경에 지내면서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큰아들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일명 집 밖의 탕자로 부르겠습니다. 그러면 큰아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으면 이 아들은 집 안의 탕자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집안의 탕자로 불리는 큰아들을 놓고 제목을 「당신은 매우 불행합니다.」로 정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화답하여야 합니까? 지난 주일처럼 하시면 됩니다. 당신은 매우 불행합니다. 하면 아닙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로 답하시면 됩니다. 「당신은 매우 불행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매우 행복합니다. 할렐루야.

 

 

 1. 큰아들로서 아버지의 마음 가지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되므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여기 큰아들은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작은아들은 생각이 짧아서 부모님의 마음을 모른 채 장래의 상속분을 받아 먼 나라로 분가해 갔습니다. 그러나 그날부터 아버지는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었습니다.

아무 탈 없이 지내야 할 터인데 하는 염려입니다. 그러나 계속 안 좋은 소식, 부끄러운 소식만 들려옵니다. 이 때문에 아버지 마음은 애간장만 녹아내립니다.

그런 부모님의 근심거리가 된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즉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22, 23). 이때 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큰아들이 잔치하는 분위기를 보았습니다.

 

큰아들 관점에서 속은 조금 쓰리겠지만 동생이 돌아온 이상 함께 잔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쁨을 나누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아버지에게 강한 불만을 터뜨립니다.

동시에 동생에게는 이 나쁜 놈 너는 내 동생 아니야, 라는 식으로 식식거립니다. 꼬락서니 봐, 염치도 없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들어와, 하는 마음입니다. 큰아들 속 마음을 보겠습니다.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직 부모님은 계시지만 이제 이 집은 자기의 집입니다. 모든 일도 자기의 일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따라 꾸려갈 수 있는 환경입니다. 아버지를 섬기며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동생을 향한 너그러운 마음이 전혀 안 보입니다.

큰아들은 자기를 불쌍한 처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에다 비교하면서 나는 열심히 일했고 아버지의 속을 썩인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놈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십니까?

나는 신실하게 살면서 곁길로 나간 적이 없는데도 잔치 한번 베풀어 주신 적 있습니까? 라며 항의합니다. 이것이 집 안에 있는 탕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작은아들의 처지를 봅시다.

이미 일정한 상속분을 받고 나갔다가 탕진하고 돌아온 처지입니다. 집에는 돌아왔으나 아무 실권도 없습니다. 아버지 보다는 형의 눈칫밥을 먹고 지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큰아들이 아버지 집의 실세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의 모든 재산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신분입니다. 그러면 큰아들은 마음을 조금만 넓히고 보면 범사에 기뻐할 조건을 다 갖춘 셈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장자로서 속 좁은 모습만 보입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다 탕진하고 돌아온 일을 놓고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라고 말합니다(24).

 

이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큰아들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채어야 합니다. 아버지, 동생이 밉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가 품겠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아버지 제가 동생을 한번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라는 말도 진작 나왔어야 합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그런 넓은 마음이 안 보입니다.

이러고서야 어찌 한집에 사는 아버지의 아들다운 아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큰아들은 형의 처지에서 집 나간 동생을 찾지 않은 윤리 부재의 허물이 있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이 비유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의도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전해 주시려 함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함입니다.

 

마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2. 풍성한 재산을 소유하고도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가 심기가 뒤틀어진 큰아들에게 조용히 타이르는 말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아버지와 같이 사는 큰아들은 아버지의 재산 모두가 자기 것입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기심 때문입니다. 동생이 돌아옴으로써 아버지의 사랑과 재산 일부분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이 본문에 베어져 있습니다.

아버지가 동네 사람을 불러 잔치를 베푼 모든 비용도 자기 몫에서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더욱 질투가 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떻게 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큰아들인 자신에게 주어진 복과 특권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함을 지적해 주는 말입니다. 큰아들이니 장자 아닙니까? 아버지의 재산 ⅔를 상속받을 수 있는 위치입니다.

거기다 동생은 이미 자기 몫을 받아 나갔습니다. 따라서 지금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이 자기 것입니다. 이제는 아버지를 제외하면 상속자로서 어른 노릇 할 수 있는 권위까지 가졌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자리입니까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왜 불행한지 아십니까?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갖지 못해서입니까? 그것도 역시 아닙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누리는 즐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는 이상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소유가 늘어나서 마음이 흡족한 것처럼 느껴져도 행복은 아닙니다.

 

전 05:13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섬겼다는 말을 보십시오. 종의 처지에서 상전을 의무감으로 섬기는 듯한 말로 들립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나오는 진정한 사랑과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는 종과 같은 자세로 섬겼다는 사고입니다.

큰아들은 즐거움과 기쁨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런데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욕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그렇습니다.

교회를 출입하면서 세상 목적을 가지고 믿음 생활하면 피곤한 자리에 들기 쉽습니다. 우리 모두 계산해서 하나님을 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모든 것이 풍부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내가 누리는 행복의 답은 예수님입니다. 그분 안에 거하십시오. 그때 비로소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불행을 해결해 주실 분과 동행하여야 불행이 종식됩니다. 행복이 꽃 핍니다. 주님 안에 거합시다. 그분으로 인해 즐거움을 누립시다.

 

 

 3. 형제 사랑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불행은 그 처지가 불행한 자리에 놓여서 불행한 때도 있습니다. 행복 속에 있으면서도 행복의 가치를 알지 못함으로 불행한 때도 있습니다. 전자가 작은아들이요 후자가 큰아들입니다.

큰아들의 불행은 바로 형제애를 주고받는 기쁨을 모르는 데 있습니다.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에서 나는 풍악 소리를 듣고는 집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아버지께 직접 묻지도 않습니다.

종을 불러내어 자초지종을 물어봅니다(26). 그러자 종이 대답합니다. 당신의 동생이 건강하게 돌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27).

 

오래전부터 큰아들은 동생의 자유분방한 행동과 분가로 아버지와 동생에게 대단히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있는 데도 재산 상속을 요청한 동생의 불효나 또 그 일을 동의해 준 아버지의 처사가 잘못되었다고 여겼습니다. 먼 나라로 사업을 하겠다며 떠난 작은아들의 소식을 아버지도 형도 들었습니다.

대단히 좋지 못한 소식입니다(30).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먼 나라로 간 아들의 소식이 다 들려옵니다. 마지막에는 허랑방탕하여 모든 것을 탕진하였다는 소식입니다.

상속분을 정리하여 집을 나간 동생이 형편없는 거지꼴이 되어 염치도 없이 돌아왔다고 하니 정말 기가 찰 노릇입니다. 열 받을만합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놓고 감정을 표현합니다.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그놈이 나갈 때는 언제고 염치도 없이 돌아왔다는 말입니까? 들어왔으면 아버지는 심한 욕이나 하고 쫓아낼 것이지 돌아온 놈이 뭘 잘했다고 당일 이렇게 잔치를 베풉니까?

큰아들은 집에서 울려 나는 풍악 소리의 내막을 알고는 더욱 화를 냅니다. 얼마나 화를 내면 아버지가 나와서 큰아들 비유를 맞추며 달랩니다. 그래도 큰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거친 불평을 늘어놓고 있습니다(28, 29). 아버지의 기뻐하는 마음과 큰아들의 분노하는 마음이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부모님이 좋아하는 자녀, 효도하는 자녀는 어떤 사람입니까? 부모님의 마음을 자녀가 잘 알고 따르는 일입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이 돌아옴으로 인해 기뻐하는 일을 자기가 소유한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불행의 출발입니다. 만일 큰아들이 형제 사랑에 대한 깊은 정이 있다면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아버지 잘하셨습니다. 하며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해야 합니다. 동생을 향하여 달려가 안고 왜 이제야 왔느냐? 얼마나 기다렸다고 하면서 얼싸안고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동생을 이렇게 부릅니다.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큰아들은 자기의 동생을 동생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형제애를 완전히 끊은 상태를 유지하는 말입니다. 형제애가 안 보입니다. 이 일이 불행의 출발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큰아들은 자기의 특권에 맞게 책임도 잘 이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고쳐야 할 문제입니다. 어쩌면 큰아들의 모습은 때로 교회에 오래 출석한 우리의 모습일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작은아들은 이방인을 뜻하며 큰아들은 유대인을 상징한다고도 해석합니다. 이방인이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들어와 구원받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데 정작 하나님 아버지 집에서 사는 유대인이 싫어하고 있음을 비유합니다.

 

불행이란 욕구의 불만족과 환경의 고충에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 속에 살면서 행복 속에 있음을 깨닫지 못할 때 옵니다. 우리는 행복을 어디 가서 무엇을 하여 행복을 찾으려 하지 맙시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편안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음이 복 중의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