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2년 말씀

당신은 매우 행복합니다 1. [작은아들 눅 15:11~2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6. 11.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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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예수님의 비유 중에 제일 유명한 비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일명 탕자(작은아들) 비유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이며 비유 중의 면류관이라 부릅니다.

눅 15:11~24절 이야기는 교회에 어느 정도만 다니셨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비유입니다. 심지어 불신자들도 탕자의 이야기를 자기에게 적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회 경험이 많은 목사님 가운데 더러는 눅 15장의 탕자 비유를 설교 본문으로 택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도 많이 들었고 잘 알기 때문에 그 선입관으로 인해 지겨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실상은 모르기가 쉽습니다. 탕자의 이야기를 자기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재산 가지고 가출한 일도 없고 방탕한 적도 없다면 이 탕자 이야기는 정말 나와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까? 오늘 여러분은 탕자와 같은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나와 상관없는 말씀으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나와 상관있는 말씀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신령한 차원에서 내가 탕자라는 전제 아래 오늘 말씀 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당신은 매우 행복합니다.」로 정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 나는 행복합니다. 로 화답하시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행복합니다. 아멘 예, 나는 행복합니다.

 

 

 1. 탕자의 길로 들어서는 작은 아들 모습입니다.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아버지의 간섭을 벗어나서 자기 기준을 따라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탕자로 가는 출발점입니다. 12절이야말로 한 청년의 몰락을 부추기는 전주곡입니다.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나아와 독립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이런 요구는 둘째 아들이 신 21:17에 나오는 재산 상속의 법을 잘 알고 청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할 때 장자에게 재산의 ⅔를 차자에게 ⅓을 나누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이런 요구는 관례에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재산 상속은 아버지의 임종(臨終)이 임박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살림을 두 아들에게 각각 나눠주었습니다. 작은아들도 자기 몫을 받았고 큰아들도 역시 자기 몫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분가하지 않을 때는 상속분의 사용권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아버지의 동의 없이는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작은아들이 재산을 처분하여 먼 나라로 간 것은 아버지가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도무지 꺾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 작은아들은 일찍부터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성인이 되자 이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미리 받아 멋진 삶을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현실로 나타내었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을 벗어나 멋지게 살아가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상당히 매력이 있는 삶처럼 느껴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작은아들 행동을 매우 좋은 발상이라고 여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건전한 인간관계를 통해서 인격이 성숙합니다. 초라한 모습일지라도 건전한 관계에서 교정이 됩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은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깨닫기엔 아직 철이 들지 않았습니다. 작은아들이 사업을 빙자하여 가출하는 것이 가정이 불행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의 아버지가 무섭고 억압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심이 많고 멋진 아버지입니다. 재산의 몫을 아버지가 죽기 전에 준 것은 굉장히 이해심 많고 자상한 아버지의 증거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종이 많이 있습니다. 풍요한 재산도 있습니다. 가정환경도 좋습니다. 이만하면 매우 행복한 환경입니다. 더 바랄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가출하려 한다면 간섭과 속박을 벗어나서 생활하려는 방종 된 생각에 이미 사로잡혔습니다.

마음에 강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독립은 이겨낼 수 없을 정도의 유혹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언제든지 돌출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요즘 많이 쓰는 말이 무엇입니까? 자율 인생입니다. 학생은 자율 학습입니다. 중학생 때부터 자율 학습이 뇌리에 자리 잡고 있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율 인생으로 바뀝니다.

자율이라는 말 상대방을 잘 배려해 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자율이라는 단어가 신앙 세계에 들어오면 믿음의 가치관이 혼라나해질 수 있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 신앙인은 자율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본주의입니다. 내 마음과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침내 작은아들은 꿈을 안고 물려받은 재산을 정리하여 먼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아버지의 훈계도 명령도 간섭까지도 미치지 않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곳으로 갔으니 얼마나 즐겁고 가슴이 확 트이는 일입니까?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삶입니까?

그러나 이런 자유는 사람을 타락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게 합니다. 죄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길은 불행의 그림자가 찾아옵니다. 작은아들은 이 불행의 그림자를 모르고 있습니다.

 

 

 2. 아버지 품을 떠나갈 때 삶의 고난과 위기가 찾아옵니다.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작은아들은 물려받은 재산을 속히 현금화시켜 원하는 그 나라로 갔습니다. 사업을 하겠다고 갔으면 시장조사부터 하여 사업의 기초부터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허랑방탕한 일부터 먼저 하다 보니 재산이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작은아들이 간 먼 나라가 어디입니까? 정확하게 어떤 나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 기자 누가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관점에서 보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많이 모여사는 에티오피아나 애굽일 것으로 짐작합니다. 작은아들이 먼 나라에 가기까지 신속하게 재물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십시오. 부모님 품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바로 보입니다. 이런 계획은 순간 즉흥으로 실행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꿈꾸며 계획한 일입니다. 마침내 기회가 오자마자 즉각 현실로 옮겼습니다.

 

성공에 대한 계획을 내다보고 갔으면 작은아들은 성공을 위한 바탕을 나름 닦아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성공보다 자신부터 절제하지 못하여 무너지고 있습니다. 단번에 몰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재물도 벌써 탕진하였습니다. 건강도 무너졌습니다. 사업 설계도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세상 향락의 요소가 작은아들의 재물과 건강과 건전한 정신과 자유 의지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세상의 향락이란 처음에는 조금씩 사람의 도덕 세계를 깨뜨리고 서서히 사람의 가치관까지 빼앗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의 자리로 몰아갑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므로 결국 궁핍한 자리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 많은 재물이 순간의 향락 때문에 날아갔습니다. 때를 걱정해야 할 처지로 전락하자 곁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찬찬찬 하던 친구는 소리도 없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장단을 맞추어 주던 웃음의 여자도 역시 소리도 없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돈 귀한 줄 모르고 막 쓰다 보니 어느 틈에 사장의 위치에서 종의 처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제 작은아들 일명 탕자는 인생무상을 실컷 경험한 셈입니다.

세상의 쓴 물을 제대로 마시고 보니 남은 것은 목숨 하나뿐입니다. 때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자율의 삶을 제대로 제어 못하면 삶의 설계도는 정상 궤도를 벗어납니다. 탕자의 한탕주의 구상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잠 28:19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따르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요즘 전도하는 일이 무척 힘듭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마이너스 된 지도 좀 되었다는 통계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교회에서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기독교의 진리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일 것 같습니까? 그런 것보다 세상의 삶을 제한하는 듯한 종교의 규범에 복종하기 싫어서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마음에서 교회를 등지고 살아보면 그 길의 마지막은 허무입니다.

 

15….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붙여 산다는 말은 얹혀서 산다는 말입니다. 종의 처지로 전락한 탕자의 밑바닥 삶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유대인은 예로부터 동족은 종으로 부리지 않습니다.

다른 민족의 종이 되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만약 동족 중에서 그가 진 빚이나 형벌로 인해 종으로 부릴지라도 50년이 되면 조건 없이 해방해 주어야 하는 희년의 법이 있습니다(레 25:54). 탕자가 된 작은 아들은 얼마나 비참한 자리, 불행의 자리에 들어간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유대인은 돼지를 불결한 짐승으로 취급하기 때문에(레 11:07, 신 14:08)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고 돼지 치는 일도 꺼렸습니다.

그러면 탕자가 돼지 치는 일을 하는 것은 그가 삶의 큰 위기를 맞이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존심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혈기 왕성한 청년이 마음껏 자유를 누리기 위해 꿈에도 그리던 낭만을 잠시 맛보다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는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낯선 곳에서 건강한 삶의 내비게이션이 작동하지 않아 종의 자리로 전락했습니다.

 

이런 일은 여기 탕자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믿음 생활에서 흔히 체험되는 일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한번 돌아보십시오. 주님의 품을 떠나 내 소신껏 생활해 보겠다고 정해진 성경 법도나 원리를 떠나면 잘 될 것 같습니까?

나중 형편은 오히려 주님과 교회만 등지는 자리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떠나게 될 때 분명히 찾아오는 위기가 있음을 경고합니다. 자유는 하나님 품 안에서 누려야지 그 품을 떠나면 위기를 맞습니다. 어항 속의 고기가 더 넓은 곳이 그립고 또 현재 있는 곳이 갑갑하다고 뛰쳐나가면 곧 죽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3. 작은아들은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려고 결단합니다.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탕자로 전락한 작은아들이 스스로 돌이켰습니다(17). 자기를 되찾았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전에 먼저 자기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탕자는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자기를 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를 떠날 때 신앙을 잃어버린 모습 그때 이미 죄악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이제 탕자는 자기의 허물과 죄를 완전히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나라로 온 것, 아버지 속을 썩인 것이 큰 죄인 줄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아버지께 돌아가서 아들 자격이 없음을 고하려 합니다. 품꾼의 하나로 쓰임 받아도 좋겠다고 고하려 합니다. 이런 결단이야말로 회개의 자리로 가는 통로입니다.

결단은 회개의 출발입니다. 이런 굳은 결단의 마음을 가졌다고 회개의 자리에 들어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회개는 문제를 청산하고 하나님과 연합된 자리로 들어옵니다.

지금 탕자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려는 결단의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이 탄식과 함께 눈물 흘리는 행위를 회개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말 진정한 회개입니까? 회개가 아니라 후회입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판 일을 죄로 알고 후회 정도는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 일이 괴로워 목매어 죽었습니다. 이런 일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입니다.

 

마 27:0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며 0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탕자는 명예, 체면, 자존심 등을 다 버렸습니다. 이대로 아버지께 돌아가도 좋은가에 대한 관심만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벌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서 생각의 방향을 돌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내 모습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하려는 사람이 회개해 보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회개할까 하다가는 기회를 놓치기 쉽습니다. 회개하기 위한 계획이 너무 복잡하면 회개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돌아와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으로 혼자 뉘우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돌아와서 잘못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탕자가 되기 전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세상 법으로는 죄가 성립 안 되지만 윤리와 신앙 면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죄라는 고백입니다.. 한 마디로 집을 나갈 때 그의 의도가 나빴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었고 충고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집을 나간 모든 행위가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잘못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자신의 심중에 죄가 있고 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탕자가 아들의 자격을 다시 회복하려는 저의나 재산에 대한 또 다른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하나 아버지 곁에 와서 살고 싶은  마음 하나만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또 하나의 자기 평가는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도 아들의 자격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았습니다. 19절 고백을 봅시다.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미 아들 자격 잃었는데 어찌 또 아들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저 외양간이나 지키며 머슴살이로 살아도 좋겠다는 마음 하나입니다. 아들 자격을 포기하는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는 따뜻하게 맞아주십니다(20). 자기를 돌아보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라는 고백이 무너진 사랑을 회복합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자리에 앉으려면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면 됩니다.

 

다음주일에 2부를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