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합니다.(요일 03:14~20)
어느 추운 겨울날 미국의 한 빈민가를 오갈 데도 없는 한 굶주린 소년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만치 문이 열려있고 불이 환하게 켜진 집이 보입니다. 소년이 볼 때는 마치 자기를 환영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집 대문에는 요 03:16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소년은 그것을 보면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람들이 이 소년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때 소년은 아, 요 03:16이라는 것은 나같이 오갈 데 없는 아이를 반갑게 맞아 주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요 03:16이라고 적힌 식탁에 따뜻한 국과 음식이 놓여 있습니다. 아, 요 03:16은 이렇게 따뜻한 음식이구나.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소년에게 아주 안락하고 평안한 침대가 주어졌습니다. 침대 역시 요 03:16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 요 03:16은 이렇게 평안한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소년에게는 풍성한 식탁이 주어졌습니다. 역시 요 03:16이었습니다. 드디어 아침 식사를 한 후에 그 집 식구들과 소년은 식탁에 함께 앉아 요 03:16을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03:16을 읽은 후 그 집의 부인이 소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지금까지 네가 이 집에서 받은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랑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때서야 소년은 요 03:16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반갑게 환영해준 것, 따뜻한 음식을 준 것, 평안한 잠자리를 준 것, 풍성한 아침식사를 준 것 등이 다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요한1서는 요한복음의 속편으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과, 그 구원의 은혜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경험할 것인지를 안내하는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을 합니까? 이제 그 사랑을 따뜻한 영접으로, 음식으로, 섬김과 수고로 나타내는 것이 진정한 예수님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실천 할 것인지를 강론하겠습니다.
1. 구원받은 성도는 형제 사랑을 압니다. |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신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사도 바울을 비롯한 성경의 저자들이 예수님의 피로 속죄의 은혜를 입은 자를 놓고 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요한123서에서 구원이라는 용어를 생명, 영생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사용합니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요일 05:12절을 보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또 요 05:24절에는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구원이나 생명, 영생 세 단어가 같은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구원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말로서 천국 백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이나 생명, 영생을 받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하였고, 누가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행 04:12).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증거, 생명을 얻은 증거, 영생을 얻은 증거가 무엇이며, 어떻게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까? 바로 14절입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구원을 받은 증거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은 구원받은 성도 아닙니까? 그러면 이웃사랑을 실천하여야 되는 위치에 있습니다. 요한은 생명의 세계, 영생의 세계에 들어간 성도들의 증거가 형제 사랑임을 밝힙니다.
본회퍼(독 1906,2,4~1945,4,9)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고문을 받고 처형을 당했는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한마디로 남을 위해 사는 사람(man for others)이다. 자기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고, 베풀며 삽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김삼일 가족이라 하면서 늘 자기 욕심만 채우고,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더 많이 배려한다면 참 김삼일 가족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우선순위가 이웃사랑, 형제사랑입니다. 즉, 봉사하는 삶, 구제하는 삶, 베푸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여러분, 이웃을 위해서 형제를 위한 스타일로 바뀌어 갑시다.
우리는 주로 연말이나 특별한 명절 혹은 기념일 때가 되면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받을 때 참 기분이 좋습니다. 많이 받으면 더 좋고요. 그런데 받는 기쁨보다 나누는 기쁨이 훨씬 클 것입니다. 그것은 실천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은 받아서도 좋지만 나와 상대방이 함께 누리는 주는 일부터 먼저 실천해 보십시오. 누군가에게 줄 때 그 기뻐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행복으로 바뀝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을 실천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까? 그러면 저에게 문자하나 날리세요. 응원하겠습니다.(^^)
2. 구원받은 성도는 희생과 베풂이 있습니다. |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는 절대 빈곤층, 못 먹어서 배고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있을 것입니다. 이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음식 쓰레기 안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이 분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보고도 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의미는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보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하고도 형제의 궁핍함을 외면한다면 과연 그 사람이 구원받은 성도라고 말 할 수 있느냐? 라고 묻습니다.
요한은 17절 말씀에서 구체적인 사랑의 예로 최소한의 생활조차 어려운 사람을 마땅히 돌아 볼 것을 권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감동이 옵니까? 굶주리고 헐벗은 이웃들, 고독하고 외로움에 떨고 있는 이웃들, 병든 가운데 좌절하고 낙심하는 이웃들이 보입니까?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재기하지 못하고 무너진 이웃들을 향하여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울어 나옵니까? 그러면 생명을 얻은 자의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야 할 곳에 베풀지 아니한다면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삶으로 자기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신 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당시 농경사회의 상황에서 소출의 일부분을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내어놓으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의 시대에서는 내 소득 일부분을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신 24:22)는 말씀을 보십시오. 과거에 너희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지 않느냐? 그 상태에서 구원을 받아 현재의 복을 누리고 있음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나도 구제의 자리에 조용하게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현재의 삶의 방식을 겸손하게 이끄는 방편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바쁩니다. 내 일도 다 못하고 있습니다. 할 일이 계속 쌓여 있습니다. 지금은 시간을 낼 수도 없고, 호주머니도 열 여력이 없습니다. 적당한 때가 오면 그때는 얼마든지 이웃 사랑에 참여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됩니다. 라고 말합니까? 지금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면 나중에도 역시 못합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자리에 들어왔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즉각 실천하여야 합니다. 천천히 다음에 라고 계속 시간 핑계를 하면 사랑을 베풀 기회와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동시에 날아가고 맙니다. 영생을 얻은 자의 모습은 이웃을 사랑함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3. 구원받은 성도는 사랑의 행함이 있습니다. |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세상의 일에서 제일 쉬운 일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제일 어려운 일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제일 쉬운 일은 말로 하는 것이며, 제일 어려운 일은 행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말과 혀는 같은 의미로서 실천이 없는 사랑이고, 행함과 진실함은 사랑의 실천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보면 사랑에 목마른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대빈곤이 아닌 절대빈곤,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18절 말씀은 나에게 절대 빈곤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픔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라, 그들에게 말과 혀로 다가가지 말고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라고 명합니다.
말과 혀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말입니까? 축복하는 말, 격려하는 말, 위로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상황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죽으러 가는 사람이 이런 말을 듣고 삶의 방향을 바꿔서 돌아온다면 생명의 말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격려의 말이 아닌 사랑의 빵을 구하는 자에게 말과 혀로 사랑을 베풀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당신이 말로 가르쳐 준 것도 내게는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당신에겐 명백하여도 내겐 희미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 당신으로 인해 주님이 누구인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도움의 손길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약 0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헐벗고 가난한 형제가 있는데 말로만 가서 밥해먹지 왜 굶고 있어? 왜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거야, 집에 가서 장작불이라도 떼라고 왜 그러고 있어? 라고 말 한다면 당연히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선진국의 경우 대개 기부문화가 잘 발전하였습니다. 액수가 많던 적던지 간에 매월 조금이라도 사회복지단체에 기부하고, 후원금을 냅니다.
또 어려운 일을 당하면 이웃을 섬기고 봉사를 잘 합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돈이 많기 때문에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부문화가 발전하고 나보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베풀며 도우는 삶을 살기 때문에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회심을 하는데 3가지를 회심해야 온전한 회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머리의 회심입니다. 자기중심의 생각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가슴의 회심입니다. 마음이 바꿔져야 합니다.
세 번째는 돈지갑의 회심입니다. 진실로 그의 씀씀이가 달라지지 않으면, 그의 가진 재물을 가치 있게 사용하지 않으면 그는 진실로 거듭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하자. 그러나 그것은 말로 되어 지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사랑이 구체적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주변에도 육신의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독으로 몸부림을 칩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의 닫힌 마음이 이웃을 향하여 열리기를 바랍니다. 열려 있다면 닫히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구체적이며, 실천함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구원과 믿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14).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라이언이라는 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은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때문에 늘 벽장에 숨어 지내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이 때문에 라이언은 친구들과도 거리를 두면서 외롭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같은 반 네드라는 학생이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는 라이언을 보고는 다가가서 같이 먹어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라이언은 깜작 놀라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었습니다.
라이언은 그날 온종일 네드의 친절에 어떻게 감사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복도에 있는 게시판을 보고는 하트 모양으로 오린 종이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네드, 오늘 함께 점심을 먹어 줘서 고마워. 정말 즐거웠어, from 라이언.
다음 날, 라이언의 쪽지를 읽은 한 학생이 용기를 얻어 사이가 멀어진 친구에게 미안해라고 쓴 하트 모양 종이를 붙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말로 전하지 못한 사연을 종이에 담았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수백 개의 하트가 게시판을 가득 메웠고, 학생들은 게시판을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의 사랑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성경은 믿는 자를 위한 책입니다. 믿는 것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보아야 나를 위한 말씀이 됩니다. 오늘 말씀도 구원받은 성도를 향한 말씀이요 바로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말씀이 오늘 나에게 어떤 감동을 줍니까?
주변에 외로움과, 육신의 아픔과, 배고픔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려주는 감동으로 들려와야 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의 신음하는 소리를 듣습니까? 아파하는 소리를 듣습니까? 주위에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신음하는 소리를 듣습니까? 다가가서 손을 힘껏 잡으십시오.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 지니라.